[시유/SeeU] 분홍빛 비 - 김치맨 [오리지널/Original]
안녕하세요 김치맨입니다.
얼마만에 신곡으로 찾아 뵙습니다.
이번곡은 잔잔한 느낌으로 가면서 스토리 있는곡으로 쓰고 싶어서 조금 일을 크게 벌려봤습니다. 무슨 내용의 스토리 일지 여러분들도 아래의 있는 아련님의 소설을 읽어보며 같이 생각해보세요~
작곡:김치맨
편곡:김치맨
작사:김치맨,니키
일러스트:그러니,류하
영상:그러니
소설:아련
아이디어:니키
분홍빛 비
언젠가 당신이, 그렇게 말했던 것도 같은데.

바람이 몸을 쓸어내렸다. 한번, 또 한번. 내 얇은 몸뚱아리를, 한번, 또 한번.
잠에서 깨우는듯한 손짓으로.
그러고나니 평원이었다. 의문도 놀라움도 크게 들지 않는 안온함을 느끼며, 나는 내 주변의 풍경을 살핀다. 넓구나. 끝없는 새싹들. 시야를 더듬어 올라간다. 나와 같은 새싹의 무리들 저편에는 숲이 있었다. 새싹들이 차지한 면적만큼이나 아주 넓게, 끝없이. 커단 나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느껴지는 건 머리 위를 비추는 햇살, 팔 틈새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 나와 다른 이들이 흔들리는 소리, 나무들의 숨소리. 그리고 그 나무들의 그림자와 햇살이 얽힌 틈새로-
-사람?
잎을 다듬는 손길이 조심스럽다. 물뿌리개를 들고 가녀린 몸짓으로 나뭇가지를 살피고, 잎새의 맥을 짚고, 나무 둥치에 이마를 대어본다. 이 평원의 정원사일까. 그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것도 같은데. 아니, 눈이 마주쳤을 리가 없다. 나는 새싹인데. 나는 이내 눈을 감고 아까와 같은 감각에 다시 빠져든다. 평온하고 안락하게.
그런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밀물같이 아픔이 몰려왔다가 빠져나가면, 그제서야 이 평원이 내게 주는 안락함에 발자국을 새기는. 이 공간에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아픔은 조금씩 더 천천히 밀려왔다가 조금 더 빨리 사라졌고, 나는 이런 나날들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또, 그 정원사인지 뭔지 모를 사람. 왜인지 자주 내 곁에 앉아서 노래하듯 이야기하다가 가곤 했다. 그 목소리가, 풀을 짚은 손가락이,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이, 나를 바라보는 눈이 좋았다. 이 나날들이 좋은 이유에 ,분명 그 사람의 몫도 있었다.
그 사람. 분명 내 옆에 오고 싶어서 오는 것 같은데, 이야기를 하다가 미소 짓는데, 이따금 슬퍼 보이는건 일이 고되서, 일까. 나는 다만 그 고됨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는데.
그러나 이 나날들에도 차츰 변화가 생겼다. 비가 오고 다시 해가 뜨면 내 주위의 새싹들은, 짙은 분홍색 꽃으로 바뀌어 피어있곤 했다. 처음에는 한 송이, 그 다음에는 네 송이, 좀 더 이후에는 열 송이. 그러다가, 나 혼자.
또다시 비가 온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내리는 비는, 왜 분홍색인걸까.
빗방울이 잎맥을 따라 내려가고 내 뿌리를 적시면, 분홍색 꿈이 찾아오곤 했다. 그래서일까.
비를 맞으면 달콤하고 몽롱해졌다. 아득히 멀어져 가는 정신에 누군가 달디 단 숨결을 내뱉는 것 같았다. 안락하다기보단 멍한 감각에 몸이 젖어들어가고, 언제까지고 이렇게 있고 싶은 기분이 들어버리고. 꽃이 되면 조금 더 나아질까? 그래서 다들 꽃이 된걸까? 피우면, 이 몽롱함을 피워버리면.
바스락.
발자국소리에, 나는 잠시 그런 망념에서 빠져나온다. 그 사람이다. 비구름으로 날이 어두워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당신은,”
그 사람은, 쓰고 있던 우산을 내 쪽으로 씌워 보인다. 비를 맞아 추운걸까,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도 같다. 우산을 써 몸이 조금 마르자, 정신이 조금 맑아진다. 그 사람의 우산을 쥔 손에 힘이 꾸욱, 하고 들어가는게 보인다. 힘줄이 돋는다. 손이 떨린다. 나는 다만 그런 그 사람을 올려다본다.
“당신은, 꽃이 되지 말아줘요.”
왜?
왜 당신은 나와 눈이 마주쳤을까.
왜 당신은 내게 말 걸었을까.
왜 당신은 내 곁에 있으려고 했을까.
왜 당신은 그렇게 슬퍼보였을까.
왜, 나는-
분명 우산을 쓰고 있었는데, 분홍이 아닌 비를 맞았다. 내 잎새를 따라 흐르고, 뿌리를 적시고. 툭, 투툭, 내 잎에 빗방울이 내려앉는 소리가.
툭, 투툭.
왜?

툭, 투툭.
눈을, 뜬다.
눈부셔. 단순한 천장. 고개를 옆으로 돌린다. 바깥 풍경이 보인다. 비가 오고 있구나.
“어머나”
응? 간호사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눈을 움뻑이며 나를 본다. 그리고는 이내 뒤돌아 나가며 무어라 외치는 것 같다. 선생님, 환자분이 -

퇴원하는 날에도 왜인지 비가 왔다. 우산을 펴고, 밖으로 나간다.
나는 꽤 오래 혼수상태로 있었다고 한다. 기간이 더 길어졌으면 위험했는데, 다행히도 알맞게 깨어나 줬다고, 다행이라고도 했다.
그러고 보니 꿈을 꿨던 것 같은데. 내가 새싹이고, 어느 평원에 있고, 이렇게 비가 내리고, 거기에 어떤 사람이, 아. 나는 멈춰선다. 그 사람은, 아니 너는, 도데체가.
네가 왜 거기에 있었어? 그래서 그랬던 거였어? 너, 였구나. 너여서 그랬구나. 나는 한가지 의문을 제외하고, 모든 질문에 이제야 답을 얻는다. 너.
그런데 왜 꽃이 되지 말아달라고 했어?

너는 꽃이 되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 애가 있던 자리에는 이제 작은 묘목이 생겼다. 저 숲의 나무들처럼, 이제는 저 애도 저렇게 자라리라. 그리고 나서, 머리가 하얗게 물들고 피부에 그 애가 웃은 만큼의 웃음과 찌푸린 만큼의 감정이 새겨지고 나면 이 곳에 다시 오겠지. 그러나 나는 그 애를 그 전에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알아, 잘못한거.”
바람이 머리카락을 간질인다.
“걔가 선택하게 했어야 했던 거지?”
귀 아래를 훑는 바람이 시렸다.
“그래도 이곳에 삼켜지지 않았으면 했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 듯, 바람이 작게 소용돌이 친다.
“있지,”
바람이 일순 멈춘다.
“정말로 볼 수 없는거지?”
바람은 여전히 멎어있다.
“나는 아주 잘못해 버린거지?”
나는 손으로 얼굴을 내리누르며, 애써 괜찮은 척, 묻는다. 바람이 등을 토닥인다.
“그래, 그렇지.”
그러니까 너는 몰라주겠지. 내가 죽어 여기에 왔을 때, 너를 한번 보겠다는 일념으로 이곳의 정원사가 되라는 제안을 받아드린 것도, 쭉, 너를 볼 날만 기대하고 있었던 것도, 그래서 네가 이곳에 왔을 때 많이 놀란 것도, 네가, 꽃이 되지 않아줬으면 했던 이유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의 바람을 털어낸다.
“다정한 척 하지 마. 여긴 잔인한 곳이잖아. 이렇게나 안락한 곳에서 그렇게나 달콤한 분홍색 비가 내리는데,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아니 새싹이 어딨겠어. ”
이곳은 사람이 죽으면 오는 곳이다. 천국은, 아니겠지. 나도 잘 모르지만.
사람이 혼수상태에 빠지면 이곳에 새싹으로 오게 된다. 이곳에 머무르도록 유혹하는 분홍빛 비에 잠겨버리면 그대로 꽃이 되어버리고, 다시는 돌아가지 못한다. 생각도 하지 못하고,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새싹인 상태로 혼수상태를 버텨내면 묘목이 될 수 있다. 그 상태로 현실에서 나이가 먹는 대로 묘목도 나무로 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네가, 꽃만은 되지 않기를 바랐다.
바람이 성난 듯 저만치 달려가 버린다.
“그래도 그 애를 구할 수 있어서 좋았어.”
나는 쓰게 웃어보였다.
“다신 볼 수 없어도, 그래도, 나는, 너를.”
저만치서 다시 먹구름이 몰려오고, 또다시 분홍빛 비가 내린다. 나는, 이번에는 우산을 쓰지 않는다. 바람의 시선이 느껴져서, 나는 대답한다.
“ 또 그쪽이 잔인한 점이 있다고 한다면, 이 비가 새싹들에게는 그토록 달콤하면서 나한테는 아주 쓰다는 거야. 외롭고, 비참하고, 마음이 시려. 우산을 줬으니까 된거 아니냐고 하면, 글쎄다, 그래도 좀.”
비를 맞으며 쿡쿡 웃었다. 어깨가 젖어들고 옷자락이 젖어가자, 아주 오랜만에 맛보는 아픔이 엄습한다.
“그래도 오늘은 우산을 쓰지 않을 거야.”
물컥물컥 밀려나오는 울음에, 나는 씨익 웃으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고개를 살짝 쳐들고는 말한다.
“거기에도, 비가, 올까.”
눈이 시다. 뜨겁고 아려와 견딜 수 없다. 그애가 새싹에서 묘목으로 자라나던 그 날처럼 아주 아팠다. 그래도, 그래도,
“좋아해.”
분명 이곳에는 분홍색 비만 내리는데, 조금 투명한 비가, 어째서인지 내리는 것도 같다.
자꾸만 얼굴로 흘러서, 나는 이제 눈을 감고, 너의 얼굴을 떠올린다. 아주 기쁘고도, 가슴 쓰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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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Image 전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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