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접경에서 4화 - 접경의 소년

접경의 소년

 어린 시절내게는 별명이 하나 있었다기적의 소년유치하기 짝이 없는 작명 센스는 어느 한 기사에 거론된 것이 시작이었다.

 계기는 당시 일어난 대형 사고였다말레이시아 여객기 사고말레이시아에서 한국 공항으로 돌아온 여객기가 착륙에 실패하고 활주로에 그대로 들이받았다원인은 엔진 문제였다승무원기장을 포함해 비행기에 타고 있던 277명은 커다란 폭발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단 한 명만을 남겨두고그게 나였다.

 눈을 떴을 때는 중환자실이었다의사와 간호사가 내 곁을 지키고 있었다며칠 뒤에는 낯선 이들이 찾아왔다그들은 자신들을 기자라고 소개했다나는 영문도 모른 채그들이 던지는 질문에 있는 그대로 대답했다인터뷰가 끝날 때마다 그들은 병문안 선물로 장난감이나 과자수수한 꽃다발을 주고 갔다어렸던 내게는 그게 마냥 좋았다.

 일주일이 지난 뒤에도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바가 없었다내가 물어볼 때마다 의사나 간호사들은 말을 돌리며 날 피했다. 결국, 나는 뒤늦게 찾아온 어느 방송사의 기자에게 모든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비행기 사고가 있었다. 276명이 죽고, 1명이 구조되었다생존자는 큰 수술 끝에 의식을 되찾았다그게 나였다그 사고 속에서 살아남을 확률은 제로였다기적이라고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

 기적.

 다른 이들은 내 일화를 그리 여겼을지도 모르겠지만그들은 알지 못했다내게는 뒷이야기가 있었다.

 나는 퇴원하자마자 곧바로 부모님과 재회했다그곳은 장례식장이었다두 분은 액자 너머로 젊은 시절로 회춘하고서 웃고 계셨다.나는 도저히 두 분을 반길 수 없었다만나자마자 바닥에 쓰러져 몸을 비볐다눈두덩이 부을 정도로 내내 눈물을 쏟았다울고또 울다가 지쳐 잠들기를 반복했다아무도 날 말리지 못했다.

 나는 부모님을 잃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중학교에 다닐 쯤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276명은.

 내 부모님은.

 나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 내 운명을 깨닫고서나온 답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려 했지만이준에게 부축받는 입장에 미스트 씨에게 치료부터 받자는 그의 제안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그는 느긋이 발을 움직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세계는 수많은 법칙으로 이루어져 있대요.”

 시간공간… 형태는 무궁무진하다눈에 보이는 것도보이지 않는 것들도 있다하지만 언제든어디서든 반드시 존재한다세계를 구성하는 기틀그것이 바로 법칙이다.

 미스트에게 들었다고이준은 덧붙였다만약 다른 일반인이 이 얘기를 들었더라면허무맹랑한 삼류 사이비 종교론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내게는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니었다비슷한 얘기를 어머니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미스트 씨말로는저한테서 법칙’ 중 한 가지가 뒤틀렸대요.”

 “무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준의 대답은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다.

 “저한테는 언제나 죽음이 찾아와요.”

 그는 곧바로 보충 설명을 이어갔다.

 그가 언제어디에 있는가는 상관없다어떻게든 그때 걸맞은보통 사람이라면 죽는 것이 당연할 상황이 불시에 닥쳐온다그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자신이 겪은 일들을 소개했다일상 속에 있을 법한 자잘한 소동부터 주변을 떠들썩하게 만든 큰 사고까지그의 입에서 줄줄이 나오는 경험담은 18살이 전부 겪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런 일들을 겪고도 지금까지 살아있다?”

 내가 물었다.

 “.”

 이어지는 말은 더욱 상식을 벗어났다.

 “전 절대 죽지 않아요.”

 나는 불사신이다그는 느닷없이 그렇게 선언했다.

 “그 말을 지금 저보고 믿으라고요?”

 “아까도 봤잖아요.”

 조금 전 있었던 일확실히 그것은 이준에게 특별한 무언가가 있기에 가능했다.

 “그 괴물도 갑자기 펑하고 사라졌잖아요그런 식으로 전 항상 어떻게든 살아남아요.”

 운 좋게 사고를 피한 적도 있고누군가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그리고 이번처럼 설명할 수 없는 결과를 낳을 때도 있다고그는 말했다요약하자면말 그대로 그는 결코 죽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못 믿겠으면 직접 보여줄게요.”

 “어떻게요?”

 “방법이야 많죠아무 건물이나 올라가서 뛰어내려도 되고칼로 배를 찔러봐도 되고….”

 끔찍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모습이 죽으려고 환장한 미친 노인네 같았다.

 “아무튼그래서 전 항상 죽음이 찾아오지만 절대 죽지 않는… 아, ‘죽지 못하는 몸이 됐다가 더 정확하겠네요.”

 죽지 않는 것과 못하는 것사소한 의미의 차이였지만이준은 굳이 말을 정정했다.

 “죽고 싶었는데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더라고요.”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들려주었다.

 “7살 때 비행기 사고가 있었어요타고 있던 비행기가 갑자기 추락했고정신 차리고 보니까 입원실이었어요뭔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것도 몰랐는데나중에 어떤 기자가 사고에 대해 알려줬어요제가 그 비행기에 탄 사람 중에 유일한 생존자라고.”

 거기까지만 들어보면, TV에 나와도 손색없을 기적이 그에게 일어났다.

 “그런데 그 사고로 부모님을 잃었어요슬펐죠엄청 울었어요그래도 사고였으니까운이 없었다그렇게 생각했어요.”

 이준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몇 년 뒤에 제가 어떤 존재인지 미스트 씨에게 듣고그 사건을 되돌아봤어요그제야 알았어요나 때문에나 때문에 부모님이 돌아가신 거구나내가 없었더라면 그런 사고가 일어났을 리도 없었을 텐데.”

 굳이 이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그에게는 지금까지 수많은 일이 닥쳐왔다그때마다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고통받았다그는 지켜보는 것이 전부였다.

 “미스트 씨처럼 마법도 못 쓰는 제가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어요.”

 언제 또 주변 사람들이 위험에 빠질지이럴 바에 차라리 죽는 것이 편할지도 모른다그럴 마음으로 건물 옥상에서 떨어진 것이 그의 첫 자살 시도였다눈을 떴을 때는 몸 성한 곳 없이 멀쩡히 바닥에 누워 있었다고 한다.

 죽지 못한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그럼 처음 만났을 때 위험하다 한 것도….”

 내 말에 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서도 별일이 다 있었죠.”

 이야기는 거기까지였다나는 입을 닫았다그 말이 전부 사실인지굳이 물어보지 않았다그는 시종일관 진지했고이야기가 길어질수록 그의 표정은 어두워져 갔다조금씩 가라앉는 목소리는 이루어 말할 수 없는 깊이가 느껴졌다그는 진심이었다.

 “미안해요저랑 안 엮였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이 일은 그쪽이랑 상관없죠.”

 “모르죠그건.”

 순 억지였다이건 어디까지 나와 지은의 일이었다그는 단지 우연히 휘말렸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그만큼 자책감에 빠진 듯했다그는 힘들어 보였다지친 기미가 얼굴에 훤히 드러났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그다지 좋지 않은 말재주로 괜히 위로했다가 도리어 그의 상처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그렇다고 해서 그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가만두고 싶지는 않았다.

 “일이 어찌 됐든그쪽이 절 구해줬잖아요.”

 결국나는 그에게 생각을 곧이곧대로 말했다.

 “그럼 됐죠지나간 일이 뭐 그리 중요하겠어요.”

 “.”

 이준은 말없이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했다축 처친 눈꺼풀이 조금이나마 올라가 있었다.

 “저번에도 그렇고두 번이나 빚졌네요.”

 고마워요덕분에 살았어요.

 그것으로 대화는 끝났다이준의 반응은 미묘했다그는 미스트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조용히 앞으로 걷기만 했다.

 그 침묵이 무겁지는 않았다옆으로 흘겨본 그의 입술에는 그와 만난 뒤로 처음 보는미소가 걸려 있었다.

 “걔가 말한 대로야.”

 이준은 볼일이 있다며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미스트와 단둘이 남은 나는 그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녀에게 전했다미스트는 그와의 첫 만남을 말해주었다.

 “2년 전이었나그때도 한겨울이었지.”

 한국에는 오랜 벗이 있어 자주 방문했고한국어도 그러면서 배웠다정착은 이번이 첫 번째였다이유는 개인적인 용무라며 가르쳐주지 않았다둘이 대면한 곳은 조금 특별했다미스트가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길을 걷는 중 공사장에 있는 자재들이 위로 쏟아지는 사고를 당했다.

 휘말린 사람은 두 명.

 미스트는 재주껏 마법으로 자신을 보호했다하지만 그녀는 미처 흰 머리 소년의 머리로 철근이 떨어지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결과는 놀라웠다소년의 주위로 자재가 전부 빗겨나갔다그는 전혀 다치지 않았다그것을 본 미스트는 소년에게 관심을 가졌다.

 “준이랑 딜을 했어내가 걔를 연구할 수 있게 협조해주는 대신문제를 해결해주기로.”

 “처음부터 법칙과 연관 있다는 걸 안 건가요?”

 “아니내가 신도 아니고 무슨그건 조사하면서 알아냈지.”

 미스트가 초면인 이준에게 다짜고짜 그런 제안을 한 계기는 단지 그녀의 호기심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니 벌써 2년이나 지났구나… 그때부터 꾸준히 연구를 진행했는데딱히 건진 건 없어.”

 미스트는 손에 든 머그잔을 홀짝이고 말을 계속했다.

 “‘법칙은 세계를 지탱하는 뿌리라서문제를 해결하려면 세계에 간섭할만한 힘이 필요해일개 마법사인 나한테 그런 힘은 당연히 없고.”

 “그럼 당장은….”

 “해결 못 해.”

 그녀의 대답은 단호했다다만 그녀는 여지를 남겼다.

 “굳이 있다면답은 그 애한테 있어.”

 지금 이준에게 죽음의 법칙이 뒤틀렸다는 말은 다르게 보면 그가 법칙과 이어져 있다는 소리다그렇다면 그가 직접 법칙에 간섭하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냥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근거는 없어.”

 미스트는 이준에 관한 얘기를 마무리 짓고내게 종이 몇 장을 내밀며 화제를 전환했다.

 “근데 너도 남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

 그녀가 준 종이는 저번에 준 그 서류였다나와 부모님가문에 대한 정보맨 앞부터 몇 장은 그대로였다다른 점은 그다음 페이지가 있었다.

 “이건….”

 “몰랐던 거 같은데너도 참딱하다.”

 그 페이지부터는 다름 아닌 현상수배지였다수배지 오른쪽 아래에 날개 모양 마크가 검은 잉크로 새겨져 있었다. ‘재단에서 발행한 것이었다수배 대상은 우리 가문 사람과 관련 인물 모두부모님 어깨너머로 본 적 있는 얼굴도 보였고아예 면식이 없는 이들도 꽤 많았다.


 그리고 부모님과 나도 그 명단에 있었다.

 미스트가 수배지 밑에 있는 글귀를 읽었다.

 “‘세계를 붕괴시킬 수도 있는 위험인물이라…짐작 가는 거 있니?”

 “…아니요.”

 듣도 보도 못한 소리였다.

 “널 죽이려 한 그 애는 아마 현상금 사냥꾼이거나, ‘재단에서 직접 파견한 사람일 거야.”

 ‘네가 죽어야 할 운명이라서그 정도만 알아둬.’


 순간지은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스쳤다.

 “종이는 가져가도 돼마음 같아선 준이 지인이라 더 도와주고 싶은데… 재단이랑은 별로 엮이고 싶지 않거든.”

 “아니에요덕분에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알았어요감사합니다.”

 더 있으면 그녀에게 민폐일 것 같아 나갈 준비를 했다.

 그 전에한 가지 더 궁금한 것이 있었다.

 “혹시부모님 행적도 알아봐 주실 수 있나요.”

 미스트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거기 나와 있어.”

 페이지를 한 장씩넘겼다몇 장 넘어가자 반가운 얼굴이 눈에 잡혔다아버지였다천천히 단락을 읽어갔다시선을 쭉 밑으로 내리다가어느 한 지점에서 멈췄다.

 “.”

 무의식적으로 서류를 쥔 양손을 꽉 오므렸다그 탓에 종이가 구겨졌다다음 페이지로거기에는 어머니가 있었다.

 그녀도.

 똑같았다.

 1년이 지난 두 분의 해외 출장은 지금여기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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